여산순교성지-전주교구
하늘의 문
여산순교성지
전주교구
여산순교성지는 병인박해(1866)부터 무진박해(1868)에 이르기까지,
여산 주변의 고산,금산, 진산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사법권을 가진 부사가 있는 진영이 있었던 여산으로 잡혀와 무참하게 처형당한 순교터다.
기록으로 남은 여산의 순교자들이 25명에 이르는데,
그 중 고산마을에서 잡혀온 신자들이 많았고,
특히 고산마을의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3대에 걸처 6명이 순교하였다.
천호성지의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 묘소가 있는데,
여산에서 순교하신 분들이 묻혀 있다.
교우들이 야음에 시신들을 자루에 담아 짊어지고 천호산에 가서 안장했다.
여산성지성당에서 출발하는
여산 진복 팔당 순례길을 따라 순례해본다
순례 순서는 「여산성지성당>감옥터(동헌)>백지사터>기금터>
장터>배다리>뒷말>숲정이」 로 한다
▼여산성지성당
1959년 1월 17일 나바위성당으로 부터 분리하여 설립
주보성인은 순교자의 모후
성당은 일곱 군데 순교터에서 바라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하늘의 문 성당으로 불린다
주소: 전북 익산시 여산면 영전길 14
▼동헌과 감옥
옥사와 아사 순교터
동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현 여산초등학교)에 갇혔는데,
옥에서는 고문 휴유증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옥에 갇힌 천주교 신자들은 배가 고파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기도 하고,
처형지로 끌려나오면 풀을 뜯어먹기도 했다.
심문과 고문이 있었던 곳
사진 오른쪽 맨 앞의 비석이 대원군의 '척화비'다
동헌 앞(왼쪽 흙담)에 여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과거 옥이 있었던 자리이다.
▼백지사터
백지사형이 있었던 곳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 혹은 머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얼굴 위에 백지를 덮고,
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덮는 동작을 반복해서
겹겹이 백지가 쌓여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을 쓴 곳이다.
여산동헌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백지사터
동헌 앞마당 담이 십자가 뒤에 보인다
얼굴에 백지를 겹겹이 쌓은 형상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담장 넘어 보이는 기왓집이 동헌이다.
▼기금터
교살형을 한 곳
원래 병사들의 활 훈련장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남자들은 화살로 쏘아 맞히는 사형법을 썼으며,
여자들은 연못에 빠뜨려 죽인 곳
▼장터
군문효수형을 했던 곳
장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쳐서 머리를 나무에 매달아 두거나
교우들의 손과 발, 목을 한꺼번에 묶어 나무에 매달아 두었던 곳
옛 장터의 모습, 지금도 상가로 이루어져 있다.
▼배다리
수장형을 했던 곳
세도가들이 행차할 때 배로 다리를 엮었다 하여 배다리라고 하는데,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손발을 묶고 산채로 이 물속에 던져 익사시켰고,
참형 당한 시신들도 이곳에 던져졌던 곳
▼뒷말
교수형을 했던 곳
당시 이곳까지 장이 들어섰는데,
장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 뜨려 신자들의 목에 건 다음
가지를 놓아목을 졸라 죽였던 곳
(숲정이에서 바라보이는 군인아파트 옆 정자나무자리로 추정된다)
▼숲정이
참수형을 했던 곳
당시 이곳에 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이 있었고,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참수형을 당했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