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대교구 공소

청하공소-최해두 회심경당/대구대교구

오안드레아 2023. 10. 26. 12:42

최해두 회심경당

청하공소

대구대교구

 

1959년 5월 5일 설립

 

관할본당: 흥해성당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로243번길 8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늦은 오후에 경당 앞 너른 마당에서 잔디를 깎고 계시는 분께

순례왔음을 말씀드리자 반색을 하고 일손을 놓으시고서 반겨 주시면서

2009년부터 이곳 공소에 와서 지내고 있는 신부라고 하신다.

대구대교구가 아닌 수원교구 신자인 필자는 어떤 신부님인지 처음엔 잘몰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올해로 85세 되신 조정헌 바드리시오 주교 대리 은퇴 신부님이셨다.

 

신부님께서는 경당안으로 안내하시면서

청하공소는 최해두 회심경당이라고 말씀을 주시면서

배교한 후 회심도 우리 교회사의 일부분으로 온전히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신부님께서 주신 자료에 보면

'이곳 청하에도 신유박해(1801년)로 인하여 유배 온 경기도의 유인기,

충청도의 박효인, 전라도의 김영손,  장기와 흥해에 유배된 정약용, 최해두,

조선의 밀사로 중국과의 연락책이었던 김 프란치스코,

유치수 필립보 가족들이  이 지역 신앙의 출발점이라 생각된다.'

.

'이들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청하의 점말(안심리) 등지에 숨어 지내면서

옹기 굽는 일에 종사하며 믿음을 이어 나갔다.

이후 1959년 5월 5일,

김호현 다니엘이 포항성당( 현 죽도성당) 안 베드로 신부(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와

청하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포항 천주교 청하공소가 설립되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신부님이 주신 자료에 보면

'흥해성당 청하공소는 

새로 발굴된 최해두의 참회록  「자책(自責)」과

청하 유계리 출신 최초 밀사 김 프란치스코의 활동상을 기념하고,

 

순교자의 영광뿐 아니라 배교자들의 고뇌와 회심도, 

우리 교회사의 일부분으로 온전히 자리매김함으로써,

 

 

현재의 우리들도 다시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하느님께 사랑의 마음으로 안길 수 있는 믿음의 공간

또한 진리와 평화를 마주할 성소가 될 것이다' 라고 되어있다.

 

경당 입구의 모습으로

청하공소 신자들이 주워온 돌에다가 죽도성당 신부님이 색을 입혀서

생겨난 십자가

 

최해두(앞)와 그의 아들 최영수 필립보

 

최해두의 <자책> 복사본

원본은 없고 필사본 1부만 전해 내려온 것을 복사를 해서 여기에 보관 중이랍니다.

필사본과 복사본 합하여 현재 두 부만 있다고 합니다.

 

최해두의 아들인  최영수 필립보의 어록으로

현재 132위 하느님의 종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최해두는 고뇌에 차서 회두하는 모습이고

아들 최영수 필립보는 순교자로 우뚝 서있는 모습입니다.

 

 

 

▼아래의 자료는 청하공소에 비치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순례 도장에 새겨진 닭은 

베드로의 처신에서 따온 것으로 회심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최해두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부친 최창은, 숙부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781)는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고,

한국 천주교 최초의 밀사였던 윤유림과 두 아들 명수와 명문이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본가와 처가 모두 11명이 순교한 집안이다.

그는 초기 천주교회에 입교하여 정약용, 정약종, 이현, 이희영, 황사영, 홍문람 등

초기 천주교회의 지도급 인사들과 상종, 왕래하며 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최영수 필리보

132위 하느님의 종/ 최해두의 아들

최해두의 사후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

체포 당시 한글로 된 책 2권과 묵주뿐이었다고 문초록에 기록되어 있음

아버지 최해두로부터 교리를 배웠고

기해박해 때 곤장 100대의 형벌로 장사 순교함.

 

'자책自責'은 1901년 신유박해 때 사학邪學을 믿었다는 죄명으로

문초를 받고 신앙을 버림으로써 흥해( 현 포항시 북구)로 유배된

최해두 자신의 심정과 신앙고백을 담은 참회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