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신축교안 때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관 덕 정
제주교구 성지
제주시 관덕로 19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정책, 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한 사례도 원인의 하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를 타도하려는 일본인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 세력, 그리고 생존을 위협받게 된 무당 등의 작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제주시에 진입한 민군들은 신자를 포함한 양민 등 700여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서 깊은 관덕정 정자 앞 광장이 사형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촬영한 사진에는 교우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때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그 후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현재는 황사평에 안장 되었다.
1901년 신축교안 때에, 관덕정 등지에서 교우를 포함한 양민 700여명이 피살되었다. 관덕정 광장에 널려 있던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사이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 된 상태로 있었다.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있었다. 1903년, 조정으로부터 이 시신들을 매장할 자리로 황사평을 이양받아 이장하게 되었다.(제주교구 홈페이지에서 발췌)
관덕정 정자 앞 광장이 사형장이였다.
관덕정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관아(官衙)의 일부로
병사들을 훈련 시키기 위해 세운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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