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교구 성지 27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서울대교구성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서울대교구성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296-12 순례 안내 학기중:2월 중순-6월 중순, 8월 중순-12월 중순/토요일, 일요일, 공휴일/14:00-17:00 (매월 마지막주 일요일은 월례피정으로 출입금지) 방학중: 6월 중순-8월 중순, 12월 중순-2월 중순/09:00-17:00 방문 가능 장소: 대성당(이외 출입금지)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양성교육이 시작되었으나 1866년 3월에 병인교난으로 폐쇄됨 1885년10월 강원도 원주군 범골(현재명: 여주시 부엉골)에서 사제양성교육이 재개됨 1887년3월 범골에서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로 이전하고 예수성심신학교로 개칭하여 정규과정의 사제양성교육을 하게되었다. 1909년3월 독일 오틸리엔 ..

용산예수성심신학교-서울대교구성지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서울대교구성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9길 49 (성심여자고등학교 내) 용산신학교의 설립 배경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양성교육이 최초로 시작되었으나 1866년 3월에 병인박해 때 성 요셉 신학교(베론 신학당)폐쇄됨 1885년10월 경기도 여주군 부엉골(범골)에서 사제양성교육이 재개됨 1887년3월 서울 용산 함벽정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고 예수성심신학교로 개칭하여 정규과정의 사제양성교육을 하게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용산신학교 건물은 대신학교로 교사 사용했던 것으로 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수도회와 역사 전시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신학교 성당으로 지어진 원효로 예수성심성당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다수 순교자들이..

새남터 순교성지-서울대교구

새남터 순교성지 서울대교구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명 가운데 열한 명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명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 신부가 입국한 지 6년만인 1801년(신유박해),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

용산 성직자 묘지-서울대교구 성지

용산 성직자 묘지 서울대교구성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원로15길 37 용산성당 내 용산 성직자 묘지는 한 평생을 주님 앞에 흔연히 바친 성직자를 모시기 위해 교구에서 마련한 곳이다. 1887년 3월,서울 교구에서는 신학교 건립과 묘지 조성을 위해 원효로4가와 산천동 일대의 임야를 매입, 원효로4가 함벽정에는 신학교를, 산천동 산비탈 삼호정 위에는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였는데, 이 자리는 피어린 순교지 새남터가 눈 아래 내려다 보이는 감회 어린 곳이기 때문이었다. 1889년 용산 신학교가 건립되면서 교구 성직자 묘지로 정해지고, 1941년 이 곳에 설립된 용산 본당에서 묘지를 관리, 보존하게 되었다. 1979년에 묘역을 확장 조경하였고, 1982년에 보수를 거쳐 1987년 재 조경하여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

절두산순교성지-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 서울대교구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 사적지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에 조선을 침범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한강의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범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림과 동시에 그 본보기를 보이려한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유명, 무명 신자들이 처형된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목이 베어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서울대교구 성지

한국 순교자 103위시성 터 서울대교구 성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 (여의도공원 120)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람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우리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2세 (1920-2005)께서 1984년 5월 6일에 이곳에서 103위 한국 순교 복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세웁니다. 2009년 9월 1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니콜라오 정진석 여의도공원 출입구12 위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정표 여의도공원 내에 들어가게 되면 세종대왕동상 이정표를 보면서 가다보면 '천주교 기념비'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

노고산성지-서울대교구

노고산성지 서울대교구 서울특별시 마포구 백범로 35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 노고산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형을 당하고 그대로 형장에 내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관가의 눈을 피해 모셨던 곳 가운데 하나로, 여러 처형장과 가까워 많은 순교자들이 임시로 매장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 곧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6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다. 그 뒤 이십 일가량 지나서 7-8명의 신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신자들은 시신을 큰 ..

중림동 약현성당-서울대교구 성지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식 성당 중림동 약현성당 사적 252호 1891년 11월 9일 설립 명동(종현)성당 소속 공소(1887년 설립)로 있다가 1891년에 명동성당에서 분리하면서 약현성당으로 승격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47-1 1891년 11월 9일 명동성당에서 분활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이다. 중림동 약현성당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고딕식) 건물성당이다. 명동대성당보다 앞서 1892년 완공된 이 성당은 문밖성당, 성 요셉성당으로도 불렸다. 박해 시기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 밖 사형장을 굽어보는 약현 언덕 위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인상적이다. 당시에는 건축 기술과 재정이 부족하여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절충해 성당의 형태를 간소하게 갖춘 채 지어졌다. 그러나 벽돌을 직접 제조하여 사용했..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서울대교구

단일 장소에서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가 탄생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서소문역사공원·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5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4번 출구) 조선 초기부터 한양의 공식 처형지로 지정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4월 8일부터이며 대체로 서울에 거주하거나 적어도 서울에 연고를 둔 신자들이 주로 처형되었다. 처형된 98명 중에 44명이 성인품에, 27명이 복자품에 올랐다. 1984년 현재의 공원 안에 일부 토지를 매입하여 순교자현양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기존의 현양탑은 헐리고, 1999년 이곳에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순교자 현양탑에 새겨진 성인, 복자..

경기감영 터/서울대교구 성지

경기감영 터 서울대교구 성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9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나오자마자 왼쪽) 1784년 명례방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이후로 성장해 오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들은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경기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형벌과 문초를 겪으며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 바로 경기감영이다(출처:천주교 서울 순례길) 경기감영에서 신유년(1801)에 최창주, 이중배, 원경도, 권상문, 홍인 등을 비롯한 경기지역 신앙 공동체에서 활동하던 신자들이 주로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겪었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조용삼이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대세를 받고 순교한 곳이다. 경기감영 터 경기감영은 경기 일대의 군영을 총괄하던 관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