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교구 성지 7

용수성지/제주교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지 용수성지 제주교구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1길 108 용수리 포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한 곳이다. 조선에 도착하여 첫 번째 미사를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고, 복원한 라파엘 호를 전시하고 있으며, 김대건 신부가 간직하였던 성모님 상본에 있는 그 성모상이 야외에 건립되어 있다. (제주교구홈페이지에서 발췌)

황사평성지/제주교구

제주 무명 순교자의 묘역 황사평성지 제주교구 제주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제주도에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는 과정에 미신행위나 토속신앙등 여러 가지 도덕적인 생활과 마주치면서 교리에 대한 반감에, 외래종교에 대한 도민들의 반감이 생기게 되었고, 구한말 과중한 조세정책 등 여러 가지 시대적 요인들로 인하여 제주도민 사회에는 외부세력에 대한 저항감이 팽배 해졌다. 이러한 저항감이 결국 1901년(신축년)에 폭발하여 ‘신축교안’이라는 비극적인 민란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수 백 명의 천주교 신자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사태가 수습된 후, 천주교회는 조정으로부터 황사평 땅을 보상받았고, 연고 없는 28구의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또한 초대 제주교구장이였던 현 하놀드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의 새 성..

관덕정/제주교구 성지

1901년 신축교안 때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관 덕 정 제주교구 성지 제주시 관덕로 19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정책, 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새미 은총의 동산/제주교구 성지

성 이시돌 목장 내에 있는 복음 테마 공원 새미 은총의 동산 제주교구 성지 동산을 돌면서 기도하는 곳 이 장소의 옛 이름을 딴 '새미'(SAEMI) 은총의 동산은 라틴어에서 거룩함, 영혼, 복음, 중재자, 하느님의 모습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예수님의 생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동상으로 제작하여 세워 놓았고, 삼위일체 성당, 야외묵주 기도의 길, 성모동굴, 삼위일체 야외성당이 있다. 제주교구에서는 매월 성모신심미사와 성체신심미사 그리고 5월에는 '성모의 밤' 행사와 10월에는 '로사리오 밤' 행사 등을 거행하고 있다. 여기서 부터 예수님의 생(공생활)을 나타내고 있다. ▼ 삼위일체 야외 성당 (삼위일체 성당 옥상) ▼삼위일체 성당 비가와서 렌즈에 습기가 차서 사진이 선명하지 못 하고, 코로나..

복자 김기량 순교 현양비-성지/제주교구

제주의 첫 영세자이자 최초의 순교자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 현양비 제주교구 성지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940-2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풍량으로 중국 광동 해역까지 표류하게 되고, 영국 배에 구조된 뒤 홍콩에서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와 조선 신학생 이 바올리노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워 제주 출신 첫 영세자가 되었다. 귀국하여 최양업 신부와 페롱 신부를 만나 '제주의 사도'가 될 것을 맹세하였으며, 귀향 후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경상도 통영에 장사하려 갔다가 천주교 신자란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고 교구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제주섬에 처음으로 신앙의 씨앗을 뿌린 '제주의 사도'이자 최초의 순교자이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천주가사

대정성지/제주교구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는 대정성지 제주교구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정약현과 이벽의 누이인 어머니의 장녀로 태어나 일찍 부터 천주교에 입교.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다. 황사영과 결혼하여 아들 경한이를 낳았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은 순교하게 되고,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귀양, 본인은 제주도 대정현의 노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녀는 깊은 믿음과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이웃들의 칭송을 받는 가운데 37년을 살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비록 순교를 하지는 않았으나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황경한의묘 - 제주교구 성지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과 신앙의 증인 정난주(마리아) 부부의 아들 황경한의 묘 제주교구 성지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산 20-1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제주관노로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 부부의 아들인 황경한이 묻혀있는 곳. 황사영은 1775년 남인가문에서 태어나 1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영특하였다. 그러나 1790년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후 세속적 명리를 버리게 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충북 베론에 피신하여 '백서'를 작성해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체포, 처형된다. 이로인해 어머니는 게제도로, 아내 정난주는 제주관노로, 두 살 된 아들 경한이는 추자도로 각각 유배돼었다.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로 태어나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