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순교성지
인천교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795년 조선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신부가 철종의 조모 손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씨에게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져, 왕족이었던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후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가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1845년 5월 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리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오게되었다. 그 후로도 1856년 베르뇌 장주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 신부 등이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강화도에서 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 장치선 회장과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으로 호송되어 효수당하게 된다. 1866년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불에 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빌미로 삼았고, 이후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특히 갑곶나루터는 당시 많은 신자들의 목을 베어 말뚝에 달아매는 효수터가 되었다.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이곳 갑곶진두에서 효수되었다.
인천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문헌상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장하고, 이후 사제를 파견하여 순례자들의 신심을 돕고 있다.(인천교구 홈페이지)
순교자 삼위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함에 왕래했다는 죄목으로
갑곶돈대에서 효수되었다는 문헌에 따라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였다.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부친 박 바오로(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서울 왜고개 성지에서 삼성산으로 옮긴 이)는 아들인 박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박순지(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meux 張)외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안전한 곳에 안장하는 등, 순교자들의 시신들을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순교 역사의 증거자가 된다. 그로인해 밝혀진 순교자의 행적은 150명이 넘어, 그 순교자들의 유해를 우리가 직접 보고 조배를 드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제공하셨다.
그는 인천교구의 복음화를 애쓰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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