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교구 성지

좌포도청 터/서울대교구

오안드레아 2023. 12. 19. 22:26

좌포도청 터

서울대교구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 28

(지하철1,3,5호선 종로3가역 9번 출구 치안센터 앞)

 

 

좌포도청은 조선시대 하양 및 인근 지역의 방범과 치안을 담당하던

기관이기도 하지만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박해의 역사가 살아있는 장소이다

 

교구에서 순교 터이자 신앙 증거 터임을 설명하는 표시석

 

'한국 천주교 순교 터이자 최대의 신앙 증거 터

이곳은 좌포도청 터로서 우포도청과 함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던 시기에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을묘년(1795) 북산 사건 때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이, 기해년(1839)에는

최경환 등이, 병오년(1846)에는 남경문, 임치백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병인년(1866)에는 남종삼과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위의사진에서 보는 거와 같이 종로3가 9번 출구로 나오면 

좌포도청이 현재 종로3가 치안센터(청색 화살표)로 이용되고 있어

포도청 기능이 일부나마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종로3가 치안센터 앞 화단(적색 화살표)에 교구에서 준비한 안내문이 있다.

 

단성사 앞(노란색 화살표)에는 좌포도청 터를 알리는 표시석이 있다.

 

 

단성사 앞에는 '단성사 터 역사'라는 기록물이 있다.

 

좌포도청 터(좌)와 최시형 순교터(우)를 알리는 표시석이 보인다.

표시석 뒤 벽에는 좌포도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사실과 

최시형 동학2대 교주에 대한 기록이 나열되어 있다.

 

단성골드 빌딩측에서 세워놓은 안내문에도

포도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단성사 터 역사 중에서 천주교에 해당하는 부분

1795년

천주교와 포도청

포도청이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795년(을묘년) 북산사건 때 부터였다.
이사건은 북산(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795년에 일어난 을묘박해, 
1801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1866년에일어난  병인박해를 포함한 천주교 박해시기에는 
천주교인들을 색출해내는 일이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을묘박해(1795)는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는 데 실패하자 대신 집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우일(바오로)과 지황(사바) 등 3명이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사건이다.

 

 

1801년

신유박해

1801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섭정으로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 교인들을 투옥하고 참형한 사건.
이것은 정조가 죽은 이후의 정권 다툼에서 야기된 것이다.
당시 은밀한 활동을 하던 주문모 신부는 박해가 일어나자 이는 자신을   목표로 한 것임을 알고 자수하여
1801년 새남터에서 처형된다.
순조 원년의1년에 걸친 박해로 주문모 신부외에  이승훈,
이가환 등 1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좌,우포도청에서는
심아기, 김기우, 박중환, 조신항 등 4명이 순교했다.

기해박해(1839년) 때에는 포도청에서 옥사하거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받아 순교한

순교자만 민극가(스테파노), 김성우(안토니오), 최경환(프란치스코)등 39명에 달한다.

 

병오박해(1846)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다.

병오박해 때 포도청애서 순교한 순교자는 7명이며,

이 중 남경문(베드로)과 임치백(요셉)은 좌포도청으로 순교지가 명시되어 있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는 8년이나 계속되었으며,

이 때 포도청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252명에 달한다.

 

 

1878년에는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 리델 주교가 체포되어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이후 좌포도청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때 좌포도청의 감옥 구조를 그려서 남겼다.

 

좌,우포도청 합한 순교자305명 중 61명이 좌포도청에서 순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