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윤위,‘보길도지’ 가운데...>
보길도와 고산 윤선도
늘 곧은 뜻을 꺾지 않고 강직한 신하의 정신을 지켜 연이은 상소 등으로
생애 중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산.
1637년 2월,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백이(伯夷)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기자(箕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관녕(管寧)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이 오직 나의 뜻이며,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 하여 마침내 제주를 향해 떠난다.
항해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봉을 멀리서 보고
그대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라
참으로 물외가경(物外佳境-세상 밖에 존재하는 멋진 풍경)이라 감탄하고
“하늘이 나를 기다린 곳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하여
이곳에 드높은 정신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세연지
세연지에 있는 정자 세연정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뜻으로
고산 윤선도의 고결한 품성을 엿볼 수 있다.
병자호란을 계기로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를 발견한 이후 85세로 일생을 마치기까지 7차에 걸처 이 섬을 왕래하며
약 13년간을 머무르며 어부사시사 40수와 한시 41편을 남겼고,
1671년 그 장구한 삶을 보길도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는
네 번째 보길도를 찾은 1650년-1651년(64세-65세) 에 지었다.
세연정 정자를 기준으로
왼쪽은 회수담이고 오른쪽은 계담이다.
위 사진에서 정자로 가는 다리가 비홍교이다.
계담과 회수담 사이에 서있는 세연정
회수담 모습이다.
회수담은 계담에서 물이 흘러 들어가도록 해서 만든 인공 연못이다.
앞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사투암(射投岩)이다.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七岩)이라 불렸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이다.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 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 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는 칠암(七岩)이 있는 계담이다.
혹약암은 일곱개 바위 중 하나로,
마치힘차게 뛰어갈 듯한 황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하게 돌로만들어진 보(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답니다.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오른쪽 판석보 옆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아 올렸고,
어부사시사가 불리면 여러 사람이 어울려 군무를 즐겼던 곳이랍니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며 나선형 길을 따라 돌면서 정상에 오르도록 되어있다 합니다.
▼곡수당과 서재
세연정에서 약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왼쪽 건물이 곡수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서재이다.
윤선도 다섯째 아들 학관이 휴식했던 곳이다
곡수당은 격자봉에서 흐른 물이 이곳에 이르러 곡수를 이루고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랍니다.
고산 5남 학관을 비롯하여 여러사람이 고산 선생에게학문을 배우던 곳으로
곡수 남쪽 두골짜기 중앙에 위치하면서 강학을 위한 건물이다.
곡수당 옆에 있다.
곡수당 오른쪽 맨위에 돌로 쌓아서 둑으로 보이는 곳이 상연지이다.
▼낙서재
곡수당에서 도보로 약 280m 정도로 4~5분 거리이다.
보길도지에 의하면 도와와 서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걱기 한 간씩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고 합니다.
현재는 동와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고산의 주된 주거공간이면서 작품활동을 한 곳이다.
낙서재에서 본 사당과 전사청
고산이 달맞이하던 장소.
거북형상을 하였다 하여 귀암이라 불렸다.
낙서재 뒤편 바위 이름으로
산속에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한 주자의 행적을 따른다는 뜻이 있답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이 낙서재에서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얼마간 초장을 지낸곳이다.
학관의 아들 이관이 제사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고산 윤선도 문학관
고산 문학관에는 고산과 보길도 만남, 고산의 흔적, 어부사시가에 대해서, 고산의 삶을 다루고 있다.
어부사시사
어부사시사는 고산이 부용동에서 생활하던 중 65세 되던 가을에 지은 작품이다.
이는 춘하추동 사계절로 나뉘어 각 10수씩 이루어져 있으며,
보길도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작품을 이루는 시적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동천석실은 무릎이 허약한 관계로 산을 중간 정도까지 오르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보지 못하고 내려왔답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
송시열 글씐바위는 보길도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 암벽을 말한다.
이곳은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왕세자 책봉 문제로 관직에서 삭탈되고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폭풍을 만나 잠시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암벽에 임금에 대한 서움함과 그리움을 한탄한 한시를 새겨놓았다.
세월에 의해 글씨가 마모되어 잘 알아보지 못했고,
탑본을 뜨느라고 많이 더렵혀져 있었다.
바위의 글체가 뚜렸하지 않아서
해설된 비석문을 대신 본다.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찬 바다 한 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북녘의 상감님을 우러르며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이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