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대교구 성지

신나무골성지-대구대교구

오안드레아 2024. 5. 23. 15:29

대구 첫 본당터

신  나  무  골  성  지

대구대교구

 

경북 칠곡군 칠곡대로 2189-24

 

 

신나무골은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신앙촌을 이루고 살았던 신앙유적지이다.

1885년 대구의 첫 주임신부로 부임한

로베르 신부가 이곳에 머물면서 사목과 선교의 근거지로 삼은

대구의 첫 본당 터이기도 하다.

1977년 이곳에 영남교회 선교 요람지 기념비가 세워졌고,

1984년에는 옛 사제관을 복원하고 김보록 신부의 흉상을 건립하였으며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출처:대구대교구 홈페이지)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

이선이 엘리사벳은 배손이와 결혼하여 칠곡 골버실(국우동)에 거주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팔공산으로 피난

1868 2 8일 한티 옹기골에서 포졸들에게 체포

      남편 배손이는 배교해 풀려나고,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는 순교.

1984 7 7일 선산에 있던 이선이 엘리사벳 유해를 신나무골로 이장. 

        이장하는 과정에서 목이 잘려진 것이 확인됐다.

이선이 엘리사벳 묘
이선이 묘를 중심으로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대구 읍내에서 김천으로 가는 길목에

신나무골이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했고,

신자들도 신나무골에 일찍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울에 살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1837년 신나무골로 와서 잠시 거쳐갔다는 증언이 있어 

1837년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

1837년경 샤스탕 신부가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고,

1849년부터 1861년까지 12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을 가능성도 많다.

 

1865년부터 1866년 병인박해 직전까지

리텔 신부가 경상도 남쪽 지방을 맡아 순회 전교를 했고,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

 

루르드의 성모

1882년부터 김보록(로베르 아킬레오, 1853~1922) 신부가

경상도 지방의 선교책임을 맡아 순회 전교하다가 

1885 12월 신나무골에 정착했다. 

신나무골에 정착할 때 8~9가구에 35~40명 가량의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십자형 한옥 성당

감실
성 샤스탕 유해
상량문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천주강생 2018년 8월 9일 †조환길 타태오'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

로베르 신부는 188512월 대구 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신나무골 이이전 안드레아에게

마루 하나가 있는 공소 건물, 서당 선생집, 논을 사서 정착했다.

 

명동성당(1882)과 강원도 이천(북녘, 1883)다음

남쪽에서 첫 번째로 신나무골성당이 설립됐고,

대구 계산 본당의 시발점이 됐다.

 

 

 

로베르 신부 사제관
우물

신나무골 신자들이 마시던 우물이 현재의 십자가형 성당을 지으면서 

우물이 있던 곳에 기둥을 세우게 되자

조금 떨어진 곳에 우물터를 모형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성지 내 카페 벽에 있는 벽화

로베르 신부와 계산성당

로베르(김보록,1853-1922)신부는 188512월 신나무골에 정착했다.

2년간 신나무골에서 사목을 했던 로베르 신부는

188711월 중순 새방골(송골)로 들어갔고,

189112월 대구 계산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계산동에 1896531일부터 십자가형 한옥성당을 짓기 시작해

189891일 성당을 완공했고,

1225일 비에모 신부와 함께 성당을 축성했다.

한옥성당은 190124일 밤 8시경 지진으로 시작된 화재로 전소됐다.

로베르 신부는 곧바로 고딕식 새성당을 지었고 뮈텔 주교가 1903111일 성당을 축성했다.

 

보두네 신부와 전동성당

보두네(윤사물,1859-1915)신부는

18875월경 여진이(海平)에 머물다가

로베르 신부가 188711월 중순 새방골로 떠나자 신나무골로 왔다.

보두네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18개월 정도

경상도 북부와 전라도 일부를 사목하다가

18893월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에 정착했다.

190855일 전동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1915527일 보두네 신부는 전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다 쓰러져 선종했다.

드망즈 주교가 1931618일 성당을 축성했다.

 

 

로베르 신부 흉상
빨래터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할 무렵에

개천, 빨래터, 우물, 작은 연못, 디딜방앗간[카페자리]이 있었는데

우물과 작은 연못을 상징해 카페 옆에 실개천을 만들었다.